1890년대 후반 처음 등장한 야학은 을사늑약을 전후로 국권회복과 민족계몽을 위한 야학운동이 거대한 바람으로 전개됐다. 야학에 대한 참여는 전국에 설립된 장소가 1,000 곳을 넘어설만큼 매우 컸다. 일제가 내놓은 각종 교육령과 탄압과 방해로 꺽였던 야학운동은 3‧1운동 이후 폭발적으로 진전된 민족해방운동과 맞물려 다시 발흥했다. 문맹퇴치와 민중의식을 각성할 목적으로 항일‧독립운동과 야학이 만난 것이다.
울산은 1910년 동구 남목 개운학교에서 설립한 대창야학교가 첫 야학이다. 1917년 9월에는 중남면 신화리에서 30여 명의 학생을 가르친 노동야학이 문을 열었다. 울산에서 야학 바람이 휘몰아친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 초다. 당시 울산 곳곳 35개 지역에 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청년조직과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돼 100여 곳에 이르는 야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만들어진 야학은 홀로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연계하는 노동야학연합회로 진전됐다.
1923년에는 중남면 8개소 야학회가 교사 능력향상과 노동학생 단결을 위한 노동약연합회를 조직해 순회강연회를 개최했다. 1925년엔 상남면과 하북면 청년들이 상하북노동야학연합회를 조직했다. 울산 서부지역 야학은 천도교가 주도했던 언양만세운동과 깊은 영향을 받았다. 거리(巨里)에 만든 사립 양정학원과 더불어 여러 면에 야학을 만들어 민족정신을 지켜내려 했기 때문이다.
1925년 11월에는 울산 읍내의 야학과 사설학교, 강습회등을 포함한 울산사학회 창립총회가 북정동 울산청년회관에서 개최됐다. 울산청년회 박병호, 이규장, 양봉근 등이 주도했다. 그리고 1928년 신간회 울산지회는 울산군내 노동야학의 총연합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1929년 1월에 개최를 준비했다. 언양청년동맹은 언양노동연합회를 같은 해 2월 3일에 창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