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100주년 울산교육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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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g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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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조선아이도 포기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울산 야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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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후반 처음 등장한 야학은 을사늑약을 전후로 국권회복과 민족계몽을 위한 야학운동이 거대한 바람으로 전개됐다. 야학에 대한 참여는 전국에 설립된 장소가 1,000 곳을 넘어설만큼 매우 컸다. 일제가 내놓은 각종 교육령과 탄압과 방해로 꺽였던 야학운동은 3‧1운동 이후 폭발적으로 진전된 민족해방운동과 맞물려 다시 발흥했다. 문맹퇴치와 민중의식을 각성할 목적으로 항일‧독립운동과 야학이 만난 것이다.

 

울산은 1910년 동구 남목 개운학교에서 설립한 대창야학교가 첫 야학이다. 1917년 9월에는 중남면 신화리에서 30여 명의 학생을 가르친 노동야학이 문을 열었다. 울산에서 야학 바람이 휘몰아친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 초다. 당시 울산 곳곳 35개 지역에 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청년조직과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돼 100여 곳에 이르는 야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만들어진 야학은 홀로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연계하는 노동야학연합회로 진전됐다.

 

1923년에는 중남면 8개소 야학회가 교사 능력향상과 노동학생 단결을 위한 노동약연합회를 조직해 순회강연회를 개최했다. 1925년엔 상남면과 하북면 청년들이 상하북노동야학연합회를 조직했다. 울산 서부지역 야학은 천도교가 주도했던 언양만세운동과 깊은 영향을 받았다. 거리(巨里)에 만든 사립 양정학원과 더불어 여러 면에 야학을 만들어 민족정신을 지켜내려 했기 때문이다.

1925년 11월에는 울산 읍내의 야학과 사설학교, 강습회등을 포함한 울산사학회 창립총회가 북정동 울산청년회관에서 개최됐다. 울산청년회 박병호, 이규장, 양봉근 등이 주도했다. 그리고 1928년 신간회 울산지회는 울산군내 노동야학의 총연합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1929년 1월에 개최를 준비했다. 언양청년동맹은 언양노동연합회를 같은 해 2월 3일에 창립했다.

 

일제 경찰은 야학연합의 창립과 활동을 막아 섰다. 울산군노동야학연합회 창립대회를 금지시키고 결성을 원천봉쇄하는 데 혈안이 됐다. 이는 민족교육, 민중교육을 목표로 하는 야학이 눈에 가시가 됐고 야학연합이 울산 내의 항일운동과 연계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1929년 울산 동구 사립 보성학교 폐쇄명령을 내렸고 이어서 8월에는 병영노동야학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10년 넘게 병영청년회가 이끌어 온 노동야학을 무력화 시키면서 내놓은 명분은 불온한 강사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31년 언양농민야학을 폐쇄한 것도 같은 명분이었다. 모두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선 청년들이 교육을 통해 민족과 민중을 일깨우는 것을 두려워해 직접 탄압한 것이다. 결국 1929년 100여개에 달했던 야학은 1937년에 이르면 20여개소 1,000여 명의 학생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민중교육기관이었던 야학을 관제야학으로 변질시키려 애섰다.

 

 

일제강점기 울산야학은 무산아동과 여성을 포함해 민족혼과 의식을 일깨우는 참교육기관이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이 가난했던 조선 아이들 한 명이라도 더 가르치려고 애썼던 민중교육기관이었다. 그리고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지역유지와 농민단체, 소년단체, 종교단체들을 규합해 적극적으로 민족계몽에 나섰기에 항일운동 속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여자야학과 부인야학 등 여성야학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한다. 민족독립에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없으며, 배움에 있어 가난은 장애가 되서는 안된다는 민중교육. 100년 전 깨어있는 교육의 징표 중 하나가 울산 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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