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 부부 이효정·박두복 이야기
일제강점기, 해방, 분단과 전쟁... 굴곡의 100년
배문석(울산노동역사관1987 사무국장)
들어가며
2006년 8월 15일 광복 61주년 기념식 때 독립유공자 313명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졌다. 그날 가장 눈길을 끌었던 분이 이효정(李孝貞 1913.7.28~2010.8.14)이었다. 일제강점기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한 사회주의자 이재유(李載裕 1905~1944)도 같은 날 더 높은 훈장을 받았지만 언론의 관심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여성독립운동가에게 쏠렸다. 생존 중인 최고령 독립운동가란 칭호가 따라왔다. 더불어 가슴에 피눈물이 사라질 날 없었던 이효정의 삶이 하나 둘 언론에 공개됐다.
사실 두 분 다 해방 후 61년이 된 뒤에야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으니 너무 늦은 결과였다. 일본에서 “재일조선노동자의 맹장”이라 불리다 고문사 당한 울산의 서진문(徐鎭文 1901∼1928)도 그 때 훈장을 받았다. 그전까지 사회주의계열이면 유공자 심의에 제대로 오르지 못했었다. 하지만 2004년 8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이 독립유공자 및 유족 150명을 초청한 오찬 간담회에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 기준을 완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때 일부만 인정됐던 것을 보다 확대했다. 사회주의계열은 2005년 3.1절부터 서훈명단에 많이 포함됐다. 몽양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권오설(權五卨), 조동호(趙東祜), 구연흠(具然欽) 등 54명이 대거 포함됐다.
일제강점기 국내‧외의 독립운동가 중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주의계열의 명예가 그나마 인정받게 됐다. 그리고 1930년대를 거쳐 1940년대에 들어서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굴종한 이들이 많았지만 수배와 구속을 되풀이하며 꺾이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해방과 동시에 찾아온 분단, 남북의 이념갈등 그리고 한국전쟁이 빚은 굴곡의 시대에 주홍글씨로 새긴 낙인이 박힌 채 살아간 분들이 적지 않다.
이효정이 겪은 고통의 무게역시 다른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본인이 사회주의계열로 독립운동을 시작했지만 남편 박두복(朴斗福1912~?)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박두복은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둔 채 한국전쟁 초 월북을 했기에 남은 이들은 가혹한 연좌제에 시달렸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일제경찰(日帝警察)에게 고문당했던 것만큼 해방된 조국의 경찰역시 가혹했다. 어쩌면 작은 훈장이 국가가 건네 준 유일한 보상일지 모른다.
이효정은 ‘뒤늦게라도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받아 이제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이 된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말의 행간에 기쁨과 아픔이 동시에 배어있다. 이효정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준 소설 『경성트로이카』의 작가 안재성은 인터넷신문에 쓴 기고글 속에 그런 마음을 옮겨 적었다. 동덕여고보 학창시절에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이순금(李順今), 박진홍(朴鎭洪)을 언급하며 친구들을 빼놓고 받는 훈장에 미안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효정은 그로부터 4년 뒤, 2010년 광복절 하루 전날에 영면했다. 향년 97세,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을 온 몸으로 겪어냈던 파란만장한 삶이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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