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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나오는 병영 시위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4월 4일 http://db.history.go.kr/samil/home/demons/select_demons_detail.do
4월 5일 http://db.history.go.kr/samil/home/demons/select_demons_detail.do
4월 4일 경남 울산군 병영 1차 시위
사건일시 1919-04-04 장소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시간 오전/오후 행동양상 만세 탄압양상 운동매체 문서/깃발/구호 운동주체 학생/일반
개요
4월 4일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일신학교에서 병영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 시위에 200여 명의 군중이 호응하였다.
경성과 양산 및 언양의 만세시위를 전해들은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의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 간부 이현우(李鉉禹), 이종욱(李鍾旭), 이문조(李文祚), 박영하(朴永夏), 이종근(李鐘根), 양석룡(楊錫龍), 김장수(金長壽) 등은 모의를 거듭한 후 의거일을 4월 4일로 정하였다. 4월 3일 이들은 만세시위를 준비하기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인쇄와 태극기 제작에 착수하였다. 아울러 각각 종이, 명주로 ‘구대한국독립만세(舊大韓民國獨立萬歲)’,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큰 깃발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병영청년회 회원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품에 품고 속속 일신학교 교정으로 모여들었다. 청년들은 일신학교 학생들에게 만세시위를 권유하였다. 오전 11시 40분경 양석룡이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높이 들자 모두가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 들고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주위 주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순식간에 시위군중 수는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다급하게 연락받고 온 울산 경찰서장 이하 8명의 경찰과 수비대 5명은 시위군중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작성자 : 전성현
시위 세부장소
兵營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
東里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
南外里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
山田里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
下廂市場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
下廂面事務所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
私立日新學校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西里 )
참가자 수 추정
참가자 수 : 100 ~ 200
일제 보고 자료에 100 또는 200으로 기재, 개람표 자료에는 100, 일람표 자료에는 120으로 정리되어 있다
4월 5일 경남 울산군 병영 2차 시위
사건일시 1919-04-05 장소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시간 오후/야간 행동양상 만세/집단항의/폭행 탄압양상 발포 운동매체 깃발/구호 운동주체 일반
개요
4월 5일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에서 전날의 시위에 이어 2차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 시위로 4명이 순국하였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4월 4일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일신학교 시위를 이끈 이종욱(李鍾旭), 이문조(李文祚), 이종근(李鐘根)은 피신하여 다음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5일 이른 아침 다시 일신학교 부근에 모인 주동자들은 오후 3시에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은 8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경찰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이문조 등 9명을 검거하였다. 분노한 시위 군중들은 검거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주재소로 몰려가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수비병은 발포하였고 4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작성자 : 전성현
시위 세부장소
兵營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
下廂市場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
下廂警察官駐在所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西里 )
私立日新學校 (慶尙南道 蔚山郡 下廂面 西里 )
참가자 수 추정
참가자 수 : 800 ~ 800
사망자 수 추정
사망자 수 합계 : 2 ~ 2
현장 사망자수 : 2 ~ 2
사건 당시 일제 군경 보고 자료와 일람표자료, 군에서 정리한 사상자수 보고(jssy_001_4150)에 모두 2명 사망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