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100주년 울산교육독립운동

울산공립보통학교(울산초등학교)와 6·10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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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초등학교는 1907년 울산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울산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이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식 교육제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울산 읍내(옛 울산초등학교자리, 울산객사 터)에 울산개진학교가 개설되었다. 근대식 교육에 대한 울산 지역민들의 높은 관심으로 울산개진학교는 울산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되었다. 개교 이후 학생 정원은 입학을 희망하는 지역민의 요구에 크게 못 미쳤고, 학급 수 증설에 대한 요구가 이어져 1938년에 16학급, 1941년에 21학급으로 확대 편성되었다. 울산공립보통학교는 4년제로 개교한 뒤 191123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후 6년제로 개편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교육령으로 1938년에 울산공립심상소학교로, 1941년 태화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1955년에야 울산국민학교로 울산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울산공립보통학교는 개교 이후 울산객사를 교사로 사용하였으나, 건물이 낡아 위험했다. 1932년 새 건물을 건립하기 위하여 학부모 등 지역주민들이 참여한 개축기성회가 조직되었다. 기성회는 교사 건축경비 12천원 중 3천원을 성금으로 모은 뒤 조선총독부에 교사를 증축할 것을 요청해 새로운 교사를 건립했다. 새로운 교사가 완공된 이후 울산객사는 해체되었고, 그 자리는 운동장으로 남았다.

 

191931,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42일 언양, 4일과 5일에는 중구 병영, 8일에는 온양읍 남창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울산시위는 모두 장날에 시작되었다. 울산 읍내는 일제 경찰의 방해로 시장이 열리지 않아 만세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울산읍내 주민들과 학생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높았다.  3.1운동 당시 온산읍 당월리에 사는 울산공립보통학교 학생 김인석(13)은 울산지역에서 벌어진 시위 소식을 듣고, 415일 마을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웠다. 그는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여 집집마다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독려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인석은 20여일 만에 풀려났으나 고문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19264월 순종이 사망하자 전국에서 추모행사가 거행되었다. 울산 지역민들과 보통학교 학생들은 봉도식(추모식)을 열었다. 상인들은 애도의 뜻으로 가게 문을 닫는 철시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51일 울산공립보통학교에는 지역주민과 학생 2천여 명이 모여 봉도식을 치렀다. 울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봉도식을 마친 뒤 학교 측에 하루 휴학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주일간 동맹휴학할 것을 결의하였다.  순종의 장례날인 610일을 맞아 지역의 언론사들은 경찰의 방해를 무릅쓰고 장례식 참배단을 모집하여 상경하였다.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은 울산공립보통학교, 중구 병영의 학성공립보통학교, 북구 강동 정자강습소, 온양읍 남창 온양공립보통학교 등지에서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울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추모식 뒤 동맹휴학을 하였다. 동맹휴학은 일제에 대한 학생들의 적극적인 저항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 울산공립보통학교는 근대 교육을 위한 공간이자 식민지 청년들의 의식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장소였다. 울산읍내 한 가운데 위치하여 유학생 귀국강연회, 농산물박람회, 순회 연극공연, 면민체육대회 등 대중 강연이나 행사가 열리는 장소였다. 이들 행사는 3.1운동 이후 조직되어 민족계몽과 민족의식 고양을 위해 활동한 청년단체와 소년단체 등이 주도한 것이었다. 울산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은 울산청년회, 울산소년회 등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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