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100주년 울산교육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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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로

1876 ~ ?

 

 

안태로는 일제강점기에 일생을 무산아동교육에 헌신하여 울산이 낳은 보배이자, 숨은 교육가로 알려졌다. 울산군 웅상 출신으로 30세 전후 때 일평생을 빈곤아동교육에 헌신할 결심을 하고 웅촌야학을 10여 년간 운영하였다.

3.1운동 이후 문화계몽 차원의 야학 및 사립학교 설립 운동이 펼쳐지던 19224월 울산 읍내에 최초의 야학인 동화의숙을 천도교의 도움을 받아 설립 운영하였다. 동화의숙은 울산읍의 무산아동을 주·야학으로 나누어 천도교회관에서 50여 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으며, 192412월부터는 여자야학까지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운영상 고질적 문제였던 교육장소(울산청년회관, 현 북정동 삼일회관)와 운영자금을 해결해 나가면서 1929년에는 천도교야학원으로 개칭하였는데 원장 안태로, 교원 3, 학생 60여 명이었다. 안태로는 야학 운영에 재정난이 생겨 수업이 멈출 때 마다 지역사회의 유지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거둬 야학을 이끌어갔다.

19292월 신간회 울산지회와 더불어 100여 개에 이르는 울산의 야학 및 강습소를 아우르는 전울산노동야학연합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강제 금지를 당하고 말았다. 안태로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울산노동야학연합운동회 개최(1930.05), 울산 최초의 울산유치원 원감(1930.05) 노동야학연합원유회 개최(1931.05), 어린이날 행사 개최(1932.05)를 주도하는 등 울산 지역 야학과 아동교육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를 당시 신간회 울산지회로부터 인정받아 성세빈과 더불어 민간교육공로자표창을 받았다.

1930년 일제가 강사가 불온하다며 불인가 처분을 받은 천도교야학원은 폐원 위기를 극복한 이후 울산(노동)야학으로 불리었으며, 1938년 울산학술강습소로 정식 개칭하면서 주·야학으로 확장돼 운영되었는데 학생수가 400여 명에 이르렀다. 1939년까지 울산야학이 배출한 졸업생은 무려 3,0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언론과 지역사회에서는 안태로를 무산아동교육기관에 빛나는 존재이자 내고장의 문화은인이라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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