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100주년 울산교육독립운동

6·10 만세운동

6·10 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순종의 인산일인 1926610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6·10 만세운동으로 명명되었다. 1926년이 간지로 병인년이므로 병인만세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이들 학생 중 취조받은 자가 106, 수감된 자가 53명이었으나, 어느 정도 시위가 가라앉자 이들 대부분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62511명은 제령(制令) 7호와 출판법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그 해 1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렸다.

 

이 때 재판장 에토(江藤逸夫)의 심문에 주동학생들은 거침없이 거사의 동기와 목적을 진술하였다. 이병림은 거사의 목적과 동기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새삼 물어볼 것이 어디 있느냐?”, 박하균은 우리 나라의 형편은 현명한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무엇을 알려고 하느냐?”, 이천진은 호각으로 군호를 삼아 일제히 거사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애석하다”, 이선호는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거사에 임하였다”, 유면희는 오로지 기미년 경험으로 재기하려 하였다”, 박용규는 “4,000여매의 격문을 각 남녀고보에 배부하였고 가회동 취운정에서도 계획하였다”, 곽대형은 격문 500매는 만세 당일 돈화문 앞에서 살포한 뒤 통동계 학우들과 같이 숭인동방면으로 달려가 기회를 포착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들에게 검사는 31년의 실형을 구형하였으나, 그 해 1117일 재판장은 언도공판에서 10명에게는 32, 1명에게는 1년의 징역형에 5년간 집행유예를 각각 언도하였다. 이에 검사가 상소를 제기하여, 1927325일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10여 명은 징역 1, 1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아 10명은 결국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서울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는데, 고창·순창·정주·울산·군산·평양·홍성·공주 등지 뿐만 아니라 당진·강경·전주·하동·이원까지 파급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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