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100주년 울산교육독립운동

울산의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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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3·1운동은 4월 2일 언양, 4~5일 병영, 8일 남창까지 총 4회에 거쳐 언양·병영·남창  세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울산은 1 9 1 0년대 항일운동단체 중 가장 세력이 큰 대한광복회 총사령 관 박상진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세운 사립학교가 4개 ( 196명), 서당수가 106개( 956명)로 민족교육의 열기가 대단한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민족교육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민중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습다. 민중야학의 실태를 보아도 이미 1910년대에 동면 당천리 대창야학교, 중남면 신화리 노동야학 등이 설립되어, 진보적 이념과 민족교육을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병영에서는 옛 일신학교 졸업생등이 주축이 되어 비밀청년회가  결성되어 지하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3·1운동 이전 시기에 청년회가 조직되어, 3·1항쟁을주도한 것은 전국의 사례를 살펴 볼 때 매우드문 사례입니다.

 

1) 언양의거

 

울산지역의 3·1운동은 191942일 언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3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후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의 함성과 저항은 전국 곳곳으로 넓게 퍼졌습니다. 330일 울산군청 명의로면리원(面吏員)은 차제에 전원 사직하라는 격문이 각 면에 속달돼 이들은 공포에 떨게 됩니다. 이와 같이 민족독립을 요구하는 함성과 저항이 높아가고 있던 3월 하순 상남면의 천도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봉기 준비가 무르익어 갑니다.

 

언양의 만세운동은 천도교인이 주축이 되었는데 상북면 거리(巨里)에는 천도교 울산교구가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전에 서울의 천도교 본부와 연락을 취해 민족대표 진영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아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19192월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교경(金敎慶)은 고종 임금의 인산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면서 천도교의 비밀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과 국민회보를 등사하여 울산교구로 보냅니다. 3월에는 상경한 이규장(李圭章)에게 필사한 독립선언서를 전해주며 거사 준비를 서두르라고 당부했습니다.

이에 천도교 교인인 최해규, 이규장, 이규천, 곽해진, 유철순 등이 유림대표 이무종(李武鍾), 이규인(李圭寅), 김향수 등과 협의해 거사를 결의합니다. 거사일자는 42일 언양장날로 정하였습니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상남면 천도 교회에서 밤을 새 등사했고 준비를 진행하다 거사일을 이틀 앞두고 최해규, 최해식 형제와 곽해진, 유철순 등이 예비 검속(檢束)됩니다. 이 소문이 읍내에 전파되자 사전에 발각된 것이 염려 돼 예정한 날의 거사를 주저하였다. 하지만 이무종,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최해선, 이규경등은 4 1일 밤 상남면 길천리 이규인 소유의 빈집에 모여 밤을 새며 많은 태극기를 만듭니다.

 

다음날 예정한 의거일인 언양장날은 열렸습니다. 바로 전날 41일 인근 양산읍에서 수천 명의 시위가 있었다는 소식이 언양에도 전해져, 민심이 고무된 상태였습니다. 주동 인물들은 밤새 만든 태극기를 비밀리에 간직하고 이른 아침 언양 남부리(南部里) 장터로 나갔습니다. 장날에는 상남 · 중남 · 삼동 · 두동 · 두서의 각 면과 양산 등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일제경찰은 만일을 경계하여 읍내 곳곳에 수비를 삼엄하게 하면서 수남 부락의 정병한(鄭炳漢)을 주재소로 체포해 갔습니다. 이 때 김성진 노인이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선창하였고 이규인이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선봉기를 높이 쳐들자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해 만세를 불렀습니다.

 

김만출(金晩出) 등 많은 청년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자 이를 받아든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며 언양읍내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수가 무려 2,000여 명이었습니다. 만세의 함성은 커지면서 언양시장은 삽시간에 감격과 흥분으로 휩싸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일군경이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했지만 만세 시위에 나선 이들의 의기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시위대열이 행진을 계속하자 일 군경은 끝내 군중에게 실탄사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제경찰은 앞선 주동자들을 체포해 언양주재소로 연행했습니다. 그러자 분노한 시위 군중들이 체포된 이들을 구출하려고 만세를 주재소로 쇄도해 가자 놀란 일제군경이 다시 사격하고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저항했습니다. 이때 일본 군경의 총격이 빗발치면서 손입분(孫粒粉)여사가 현장에서 순국했고, 곽해진의 모친 김씨(길천댁)를 비롯해 남녀 5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시위가 그친 뒤로도 일제 군경은 주동인물 검거에 혈안이 됐습니다. 결국 의거에 나섰던 48명이 검거돼 재판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6개월 에서 1년의 징역 선고를 받아 부산, 대구형무소에서 투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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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영의거

 

하상면 병영리(兵營里)는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있던 곳으로 이곳 주민들은 옛 부터 애국적인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강하였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이곳 청년들은 이러한 전통적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항일정신이 어느 곳보다도 강했습니다. 이러한 청년들의 결속단체로 비밀결사인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가 조직되었습니다. 19193월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은 서울에 유학했던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를 통해 33일 전해 듣습니다.

41일에 양산읍에서 봉기하고, 42일에는 언양읍에서 봉기한 소식이 이곳 청년들에게 전해지면서 병영청년회를 중심으로 항일의거의 대열로 뛰어 들게 됩니다. 당시 병영청년회 간부인 이현우(李鉉禹), 이종욱(李鐘旭), 이문조(李文祚), 박영하(朴永夏), 이종근(李鍾根), 양석룡(梁錫龍), 김장수(金長壽) 등은 하상면 서리(西里) 박영하의 집과 이종근의 집에서 모의를 거듭했습니다. 거사일은 병영장날로 정하고 한 마음과 한 몸으로 약속하면서 결사보국을 혈서(血書)로 맹세했습니다. 문성초와 김응룡은 자금을 지원했고 거사 하루 전 43일 박영하의 집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인쇄와 태극기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독립선언서 약 200매를 등사했고 태극기는 양석룡, 이종룡(李鍾龍) 책임 아래 약 500매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작은 태극기와 아울러 각각 종이와 명주로구대한국독립만세(舊大韓國獨立萬歲),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크게 쓴 깃발도 만들었습니다.

 

44일 거사일, 오전 9시경 청년회 회원들이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병영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 교정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청년회 회원들은 일신학교 학생들을 합세하게 한 후 오전 11시경 양석룡이 축구공을 높이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모두가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어서 병영청년회 회원들이 앞장서 동리(東里) · 남외리(南外里) · 산전리(山田里)를 돌면서 만세 행렬을 늘려갔습니다. 병영성내 주민들은 너도나도 호응해 만세 함성은 커졌고 삽시간에 시위군중은 수백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병영 일제 군경 주재소의 연락을 받고 울산군 경찰서장 이하 8명의 경찰과 일군 수비대 5명이 출동했습니다. 일본 군경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육박전을 벌였는데 양석룡이 무수히 구타를 당한 끝에 검거됐고 선두에서 활약했던 이종욱, 이종룡 등 10여 명이 검거됐습니다. 이날 검거된 14명은 울산경찰서로 구인되면서 첫 날 만세운동이 끝났습니다.

거사가 중도에서 좌절된 것을 분하게 여긴 이문조, 이종필(李鍾弼), 이종근 등은 남외동 곽남 부락 김세진(金世鎭)의 집에 피신해 다음날을 계획하면서 문성초(文星超), 윤학이(尹學伊), 최현구(崔鉉久), 황정달(黃丁達), 백봉근(白鳳根) 등 동지에게 연락해 2차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45일 이른 아침에 다시 일신학교 부근에 모였고 오후 3시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천을 이문조가 들고 전원이 만세를 부르며 큰길과 성 둑으로 행진하다 일본 군경 주재소로 쇄도해 갔습니다.

이 날 시위는 하루 전의 거사가 널리 알려져 군중들이 아침부터 일신학교 부근으로 몰려들어 그 숫자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일본 군경도 보강돼 시위대와 공방전이 벌어졌고 이문조 등 9명이 체포 됐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이 일본 군경을 포위해 검거자 석방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엄준(嚴俊)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경찰의 총기를 뺏으려고 육박전을 벌이자 무차별 총격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엄준, 문성초, 주사문(周士文), 김응룡(金應龍)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송근찬(宋根讚), 김규식(金圭植), 김두갑(金斗甲)등이 중경상으로 쓰러졌습다.

이 의거에 활약한 이들 중 40명이 검거됐는데 대부분 6개월 내지 2년의 징역형을 받아 부산, 대구형무소에 투옥됐습니다. 이들은 출옥한 후 전원이 곧 기미계를 조직하여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할 것을 서로 맹세했습니다. 또 일제통치기간 중에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순국한 이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현재도 병영초등학교 옆 삼일사에서 병영지역 3·1운동애국투사들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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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창의거

 

웅촌면(熊村面) 석천리(石川里)에 살고 있던 이재락(李在洛)이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갔던 서울에서 3·1운동을 겪은 뒤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신밤리(남창)에 사는 이수일(李樹一)은 고종황제의 인산 소식을 듣기 위해 서울에서 다녀 온 이재락을 찾아갔다가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독립선언서도 보게 됩니다. 이수일은 신밤리로 돌아가 즉시 문중의 어른들에게 알리고 다 같이 봉기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8명의 이름으로 된 통고문을 만들어 문중의 젊은이들을 통해 거사를 권하게 됩니다. 발기인 8명은 이용중(李龍中), 이인재(李仁載), 이석관(李錫觀), 이석진(李錫晉), 이수일(李樹一), 이석수(李錫壽), 이수만(李樹萬), 이진걸(李振杰)입니다. 그리고 당시 한학자였던 이용중에게 학문을 배우던 20대 청년 이수락(李壽洛), 이희계(李希季), 이쾌덕(李快德), 이용락(李龍洛) 등도 거사를 결의하는데 42일 언양시위와 445일 병영에서의 대대적인 항일의거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며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거사일을 48일 온양면 남창리 장날로 정하고 동지를 규합했습니다. 47일 밤 이용락의 집 안방에서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를 만들었고, 48일 이른 아침 남창리 장으로 잠입해 장꾼들이 모여드는 것을 기다린 뒤 오후 4시경이 되자 재빨리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수백 명의 장꾼과 상인들이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연호 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일군경은 크게 놀라 공포를 발사하면서 만세를 이끌며 앞장섰던 이수락, 이쾌락, 이희계, 이쾌경 등 4인을 검거합니다.

이용락은 검거를 피한 뒤 포목상을 경영하던 윤두찬(尹斗贊)의 상점으로 달려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적은 천을 장대에 달아들고 나왔습니다. 이 때 고기룡(高基龍)이 자진해서 이 기를 받아들고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하자 이수필(李樹苾), 안병철(), 김우상(金禹祥), 우동진(禹東瑨) 등이 합세했습니다. 그러나 무자비한 일경의 총검 앞에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의거에서 검거된 이는 모두 9명이며 이들 가운데 7명이 재판 결과 6개월 내지 1년형의 징역을 언도 받아 각각 형무소에 투옥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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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울산광역시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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