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교육독립운동 100년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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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울산야학과 민중교육

 

- 울산교육청 울산교육독립운동연구회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정책

 

일제는 조선의 민족교육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을 위해 각종 교육에 대한 통제법규를 만들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후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갑오개혁 때의 소학교령을 폐지하고 보통학교령(1906)를 제정해 통제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8년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에 이어 1911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제정 후 4차례 개정을 했다. 그 과정에 서당규칙(書堂規則), 사설강습회에 관한 규칙 등 수많은 규칙과 법령을 민족교육을 탄압했다.

특히 사립학교령 제정은 민족 스스로의 근대교육 의지를 꺾기 위함이었다. 당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기위한 구비요건으로 정한 2조의 7개항은 신규설립을 억제하기 위한 의도가 명백했고 9조와 10조에서는 일제가 변경과 폐쇄를 용이하게 정해놓았다. 그리고 191110월 조선교육령에 이은 사립학교규칙(私立學校規則)1915년의 개정사립학교규칙(改定私立學校規則)으로 교원의 제한을 두는 등 탄압을 강화했다. 그결과 1919년까지 전체 2,722교에 달했던 사립하교가 1919년 까지 1,969교가 폐쇄되고 753개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3/4에 해당한다.

 

국권을 탈취한 1910년 이후 일제의 식민지 교육의 기본 정책은 조선교육령의 제 1장 강령을 보면 분명해진다. 정리하면 우리 민족을 이른바 일본에 충량한 국민으로 만들고자 하며(1), 우민화(3, 5)를 위함이었고, 낮은 수준의 실업교육을 장려하며(6, 21, 22) 함께 일본어 보급 목적(8)으로 했다.

조선총독부가 교육 지배를 통해 기존 민족 사상적 기반 형성을 해왔던 민족교육을 파괴하고자 함이었다. 아울러 내선일체를 내세우면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고 독립운동을 차단하는데 목적을 뒀다.

 

 

야학

 

일제강점기 야학은 1900년 대 초부터 민족계몽 사상가들에 의해 나타났다. 그러나 꽃을 피우며 확대된 것은 1920년대다. 이는 첫째,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이 지속되고 서당도 함께 쇠퇴하면서 대중화된 민족교육 방법으로 등장한다. 둘째, 3·1운동 이후 분출된 민중의 힘을 결집해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이 야학설립에 노력했다. 셋째는 민중 스스로 각성과 자각이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일제는 야학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방임적 태도를 취하다가 야학 운동이 활발해져 전민중에 대한 영향력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야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야학의 인가문제, 교사의 사상불온, 설립 단체의 불온 이유등의 이유로 야학을 폐쇄 조치하고 야학 교사들에게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교육을 담당했던 야학은 감소하게 되었고,

단순한 강습소로 전락하거나 식민지 통치를 위한 교육체제로 편입되어 버렸다.

주권의 침해를 받거나 타민족의 지배하에 놓여진 민족들에 있어서는 민족의 실력배양과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족 계몽 활동과 민족 교육 활동이 민족 전체로 확대되어야 함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1920년대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야학은 당시 교육대상에서 소외되었던 많은 민중들의 의식 개발에 주력하였으며 당시 활발했던 각종 사회운동에 참가한 민중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는데 민족 교육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울산의 야학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애국계몽운동이 전국으로 펼쳐 치면서 울산도 야학이 시작됐다. 그리고 1930년대 말까지 일제의 탄압을 견디며 끈질기게 계속됐다.

 

동면 대창야학(1910)을 시작으로 중남면 신화리 노동야학(1917)을 언양 노동야학(1919)을 거쳐 1920년에 전면적으로 확산된다. 병영 노동야학(1920)을 비롯해 울산여자야학, 서생온상 노동야학, 병영 노동야학, 언양 여자야학, 온산노동야학, 동면 주전, 도서 서하, 삼동 출강, 범서 구영리, 동면 일산리, 하북 궁근정, 옥교 노동야학, 삼남 거리 노동야학, 길천기 노동야학, 온산 대정리 야학, 우정 야학, 강동 당사리 노동야학, 중남면 평리 노동야학, 대현 여전치 노동야학, 울산 유곡야학, 농소 호계리 노동야학, 염포리 야학, 학성동 노동야학 등 거의 모든 지역에 야학이 등장한다.

 

야학은 노동야학이 중심이 됐으나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 야학 뿐 아니라 농민야학, 청년야학, 부인야학, 여자야학 등도 함께 만들어졌다. 특히 울산은 여자야학과 부인야학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야학도 비중(16.4%)이 높았다. 언양 등 지역 청년회가 강한 곳은 한 꺼번에 여러 대상을 달리해 야학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야학을 주도한 것은 청년회였다. 19193·1 만세운동 이후 울산 36곳에 만들어진 청년회가 앞장서 야학을 통한 민족계몽, 민중계몽에 나섰다. 그 외 농민단체와 불교와 천도교회 등도 야학을 운영했다. 교사들은 대부분 20대의 청년들로 각 지역 청년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울산의 야학은 독자적으로 설립, 폐쇄된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야학간의 연합을 통해 조직화 됐다. 대표적으로 중남면 내의 8개소 야학회가 모여 노동야학연합회를 조직했고, 1925년에는 상남면과 하북면 청년들이 모여 상하북노동야학연합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울산사학회 창립총회가 울산청년회관에서 개최됐는데 이 속에 야학도 중심 과제가 됐다. 신간회 울산지회 1928년 정기총회에서 문맹퇴치와 통일된 교육을 위해 노동야학 총연합체를 조직하기로 결의된 바도 있다.

 

 

민족교육, 민중교육기관에 탄압

 

야학에서 가장 많이 교육됐던 것은 조선어와 산술이었다. 일본어와 한문도 가르쳤지만 조선어의 비중이 두배에 가깝게 높았다. 그리고 아예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은 곳도 많았다. 이는 조선어 말살정책에 불구하고 민중교육기관으로 조선어를 보급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위한 것이었다. 일례로 보통학교에선 일본어를 국어로 칭했지만 야학에서는 일본어로 정확히 명칭했다.

 

이런 상황으로 울산에서는 1929년부터 일제의 야학 탄압이 본격화 됐다. 신간회가 1929218일 울산노동야학연합회 창립대회를 개최하려고 하자 일제는 이를 불허한다. 총독부의 교육방침에 위배된다는 것과 집회가 불온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같은해 8월에는 병영노동야학을 금지시킨다. 이유는 불온한 강사가 있어 어린 아동들에게 사상을 가른친다는 것이었다. 즉 병영청년회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 목적도 포함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언양농민조합이 운영한 농민야학에 폐쇄명령을 내렸다. 1929년 동면 일산리의 보성학교에 대한 폐쇄 명령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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