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교육독립운동 100년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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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사 봉제회에서 발간한 책자 중 병영 삼일운동 관련 내용입니다.

 

3절 병영 31 독립운동사

 

기미년(1919) 31일을 기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전국적인 독립만세의거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대한민족의 강인한 자주독립 정신과 애국심을 세계만방에 선양하여 마침내 815 조국광복을 찾게 된 원천이 되었다.

당시 전국에서도 그 운동이 가장 치열하였고, 따라서 희생자도 가장 많이 낸 고장이 울산병영이었다. 이 고장 병영은 좌도병마절도사의 영성(寧城)이었던 곳으로 주민들의 상무정신이 투철하였고, 임진왜란 때 성을 빼앗긴 쓰라린 경험이 있기에 항왜정신이 깊이 잠재해 있어서 왜적에 항거를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 청년회도 있었다.

군사적 요새지였던 이곳 주민들은 누구보다도 왜적의 압제하에 강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으나, 워낙 왜적들의 감시가 삼엄하였기 때문에 울산 읍내에서는 봉기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누르면 터지기 마련이듯, 그 원리에 의해 억눌렸던 민중의 분노는 군내 외곽지인 언양을 선두로 하여 병영과 남창, 웅촌, 온산 등지에서 연달아 터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병영의 상세한 의거 과정은 다음과 같다.

31운동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이곳 병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서울에서 유학하던 한명조, 이영호로부터 서울의 독립 만세의 소식을 전해 듣고, 병영의 청년 간부인 양석룡, 이현우, 이종욱, 이문조, 박영하, 김장수, 이종근 등이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박영하 집에 모여 장장 33일간이나 의논하며 독립운동을 거행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룡, 양석룡의 책임하에 태극기 약 500장과 독립선언서 약 200장을 작성하였다. 한 달(31)가량 동지 규합과 제반 준비를 착수한 결과 만전의 준비가 완료되자 거사 일자는 이문조의 발안에 의해 44일로 정하게 되었다.

조바심으로 매일같이 의기에 가득 찬 마음으로 지내던 끝에 44일이 되자 거사의 성공을 위해 일심동체의 혈맹을 다지며, 즉석에서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깨물어 결사진충보국을 혈서로 서명하였다. 독립선언서 인쇄를 위해 이종협은 하상면사무소에 야간 침투하여 등사기를 가져왔으나 고장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복사지로서 선언서 약 500장을 작성하였고, 태극기는 이종룡, 양석룡의 책임하에 약 500장을 만들었다.

거사일 오전 9시 병영일신학교 학생들이 합세하여 교정에서 축구공을 높이 차올린 것을 신호로 대한독립만세란 기치를 양석룡이 선두에서 높이 들고, 운집한 전원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소리 지르며 병영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시민들이 그립던 태극기와 독립 만세 소리에 감명이 북받쳐 깊은 눈물을 흘리며 이 대열에 가세하자, 우렁찬 만세 소리는 산천이 진동하고, 주재소 순사는 황급히 도주하여 본서로 연락하였다. 급한 보고에 50여 명의 일본 수비대 순사가 완전무장으로 당도하여 시민들과 육탄전을 벌이고, 병영 시내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벌어지면서 일본 수비대 순사들이 군중을 무참히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왜적들은 양석룡이 소지했던 현수막을 탈취하려 할 때, 양석룡은 사력을 다해서 항거하였으나, 이들 수비대는 총대로 무수히 난타하여 실신시켰다. 이리하여 사수하던 선두기를 왜적의 손에 빼앗기고, 분함을 참지 못한 군중들은 무자비한 폭행에 항거하였으나 무기 앞에서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양석룡, 이종욱, 이종룡 외 십여 명이 동시에 체포되어 울산 본서로 압송되어 구금되었다. 다음 날인 45일에도 거사를 생각한 이문조는 이종필과 협의한 후 피신하여 곽남부락 김세진 집에 집합하기로 약속하였다.

45일 아침 일찍 문성초, 윤학이의 연락으로 이종필, 최현구, 김장수, 황정달, 백봉근, 이문조 등이 대한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현수막을 이문조가 선두에서 높이 들고 전원 만세를 부르며 시내로 행진하였다.

이날은 전날의 행사가 널리 선전되어 성외 부락민들도 아침 일찍부터 시내에 잠입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만세 소리를 듣고 수천의 군중이 삽시간에 운집하여 노도와 같이 돌진하였다. 때마침 저지 살해에 가담하였던 일본군 수비대들은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울산경찰서로 압송하니, 수천 군중들은 한 사람도 물러서거나 해산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면서 잡혀간 청년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수비대를 포위하자, 무자비한 왜적들은 발포하여 4명의 피살자와 수 명의 중상자를 내게 되어 결국 왜적의 총칼 앞에서 해산하게 되었다.

피살된 4명 중 엄준은 유족불명으로 정국명, 차인선, 윤학이, 김규석 등이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장례에 대한 절차를 의논하여 황방산록에 안장하게 되고, 그 외 3의사는 가족들과 지방민들의 비통한 상황 속에서 각기 안장하게 되었다.

구속된 12명 중 이현우, 양석룡, 이종욱, 이문조, 최현구 등 5명은 불복 상고하여 대구 감옥에서 복역하였고, 그 외는 태형, 3명은 무죄, 2명을 제외한 12명은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만일 이종협이 면사무소에서 몰래 가져온 등사기가 발각되었더라면 본인은 물론이고 주모자 전원이 3년 형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나, 거사 1개월 이상 장구한 시일에 이 비밀이 폭로되지 아니한 것을 보면 그 당시 병영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혼연일체가 되어 독립정신이 투철하였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이종필을 비롯하여 울산경찰서에 구금된 사람들의 40일간의 사식대와 제반 비용은 이종화, 이종순, 최진해, 김원일, 이인하, 윤민석, 정종화, 최현필 외 많은 인사들이 자진하여 희사하였으며, 특히 대구 감옥에서 미결수로 있던 5인의 사식대와 제반 비용 4개월분은 이종화가 자진 전담하였다.

병영의 기미 독립운동사에 특기할 것은 출감한 동지들이 일치단결하여 항일투쟁을 다시 결의하고, 기미계를 조직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였다는 점이다. 다음 해 경신년(1920)부터 순국한 4의사 위패를 옥천암에 봉안하고, 매년 46(34) 병영 청년들과 유지들은 왜정 치하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 엄숙한 추모제를 봉행하여 민족정신을 불러일으켰다.

해방과 함께 31 봉제위원회를 조직하여 거면(擧面)적으로 추모제를 지내는데 1952년 당시 하상면장 신복교 주체로 지방 유지와 협력하여 병영성의 영모각을 개수하여 삼일사라 명명하고 순국 의사들의 영령을 봉안하였다. 현재 병영에는 의거를 기념하는 31 충혼비가 서 있어 당시의 실록으로 길이 남을 것이며, 한편 부산 구포 산록에는 이종욱열사기념비문이 있다.

순국자 엄준, 주사문, 문성초, 김응룡, 수형자 이현우, 이종욱, 이종근, 이문조는 대구 감옥에서 각각 2년 옥고를 치렀으며, 이종필, 최현구, 황정달은 각각 16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박규항, 양석룡은 각각 8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백봉근, 최원득, 김송근, 이근복은 울산에서 태형 90도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병영 인사들이었으며, 이홍준은 부산에서 6개월 옥고를 치렀으니 농소면 인사이다.

31 독립운동 당시 순사로 근무하였던 병영 출신 김영하는 의사들의 압송책임자로서 부산형무소에 들어가기 전 식사시간 중에 의사들로부터 탈주 요구를 받자 김영하는 쾌히 승낙하여, ‘나는 독립운동은 못 할망정 탈주할 기회는 드리겠다.’고 승낙하자 의사들은 오히려 그 의협심과 김영하와 그 가족에게 미칠 화를 염려하여 탈주를 단념하기도 하였다. 이는 병영 인사 모두가 애국심을 투철하였던 생생한 증거이다.

독립 만세운동에는 직접 가담하지 아니하였으나, 이 운동에 음성적으로 물심양면으로 지대한 지원을 한 유지는 이종화, 이종순, 최진해, 김원일, 이인하, 윤민석, 정종화, 최종필씨 등은 의사들이 울산유치장에 구류 중 사식을 위시한 모든 비용과 여타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특히 이종화 씨는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인 의사들의 미결 4개월간의 사식과 제반 비용을 전담하였다. 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모의장소와 회의비용을 지불하면서 밀실을 제공한 박영하 씨가 있었으며, 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위해 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가져오는 어려운 일을 담당한 이종협 씨가 있었고, 현직 순사로서 의사들의 압송책임자로서 부산형무소에 들어가기 전 식사시간 중에 탈주 요구를 받자 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김영하 씨는 나는 독립운동은 못 할망정 너희들을 놓아줄 기회를 주겠다.고 한 말에 의사들은 오히려 그 의협심과 그 가족들에게 미칠 화를 염려하여 탈주를 단념한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또 김영하는 의기(義妓) 향심과 부용의 유치장 출입을 묵인해 주기도 했었다.

 

 

출처 : 蔚山 兵營 三一 獨立運動史, 울산 병영 삼일사 봉제회, 2007, 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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